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조지 플랜태저넷 (문단 편집) == 생애 == 1449년에 [[아일랜드]] [[더블린]]에서 태어났다. 11살에 아버지 리처드를 전장에서 잃고 잠시 부르고뉴 공작의 곁에서 피신했었다. 몇달 뒤인 1461년에 형인 에드워드 4세가 [[헨리 6세]]의 지지자들을 무찌르고 왕위에 올랐다. 이후 조지는 클래런스 공작에 임명되었으며 가터 훈장을 서훈받았다. 1469년에 친척이자 킹메이커로 위세가 높던 워릭 백작 리처드 네빌의 장녀 이사벨 네빌과 결혼했다. 처음 혼담이 나왔을 때 리처드 네빌을 견제하던 에드워드 4세는 두 사람의 결혼을 반대했다. 사유는 왕족은 국익을 위해 더 힘있는 가문과 혼인 관계를 맺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정작 에드워드 4세 본인은 왕족은 커녕 귀족도 아닌 평민 [[엘리자베스 우드빌]]과 결혼했기 때문에, 저 말은 어불성설인데다 리처드 네빌을 견제하기 위한 핑계에 불과했다. 이에 리처드 네빌과 조지도 혼사를 밀어붙였고 끝내 비밀리에 조지와 이사벨은 결혼식을 올렸다. 1470년에 왕을 향한 불만이 폭발한 리처드 네빌이 반란을 일으키자 조지는 장인어른의 편에 섰다. 첫 모의가 실패로 돌아가고 프랑스로 망명한 조지는 리처드 네빌과 함께 다음 거사를 도모했다. 그러나 리처드 네빌이 막내딸 [[앤 네빌]]을 [[랭커스터 가문]]의 [[웨스트민스터의 에드워드]]에게 시집보내는 것을 보고, 리처드의 옹립 대상이 자신이 아니라는 걸 깨달은 조지는 형 에드워드 4세의 곁으로 돌아갔다. 1471년에 리처드 네빌은 바넷 전투에서 패해 사망했고, 같은 해에 웨스트민스터의 에드워드도 투크스베리 전투에서 전사했다. 리처드 네빌의 가족들은 포로의 신분으로 궁중에 들어오게 되었다. 그러나 에드워드 4세는 친척에게 호의를 베풀어 앤 네빌은 언니 이사벨과 조지 부부에게로 보내졌다. 얼마 후 조지의 동생 [[리처드 3세|글로스터 공작 리처드]]가 앤에게 구애하기 시작했는데, 이는 조지에게 매우 불편한 상황이었다. 워릭 백작 리처드 네빌의 부유한 영지와 재산은 그의 두 딸들에게로 상속될 예정이었다. 앤은 상속 권리를 인정받을 남편이 없기에 재혼을 하지 않는다면 모든 유산이 이사벨에게로 가고 조지는 아내의 재산을 마음껏 사용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앤이 결혼을 해버리면 앤의 남편과 그 재산을 나눠야 했기에, 조지는 어떻게든 처제의 결혼을 막으려고 했다. 조지는 앤을 구속하려 했으나 결국 앤은 도망쳐 리처드와 결혼했다. 1476년에 조지의 아내 이사벨이 아이를 낳고 두 달 후에 사망하였다. 조지는 아내를 잃고 정신 상태가 점점 불안정해졌다. 이사벨의 죽음은 오늘날에 산후 처리 문제로 인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조지는 시녀가 이사벨을 독살한 것이라고 누명을 씌워 처형당하게 만들었다. 이후 에드워드 4세에게 몇차례 반기를 들다가 [[런던탑]]에 수감되었다. 조지는 반역죄로 기소당해 유죄 판결을 받았고 1478년 2월 18일에 처형당했다. 그의 아들인 제17대 워릭 백작 에드워드 플랜태저넷은 플랜태저넷 왕가의 마지막 남계 후손이었다. 이 때문에 [[헨리 7세]]의 왕권에 위협이 되어 10세 때부터 쭉 [[런던탑]]에 감금당했고, 램버트 심넬은 그를 사칭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1499년 퍼킨 워벡의 반란에 연루되어 처형되었고, 플랜태저넷 왕가는 단절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